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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회의와 아리우스 주의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는데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 "말씀", "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아리우스의 생각은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렸고 어부들까지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동방 각지로 여행하던 아리우스는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몇 명의 교직자들 때문에 문제는 더욱 확산하였다.

사도시대 이후로 여태까지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분이 아리우스에 의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나갔다.


1.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일체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296-373)이다. 그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그는 20대에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어 논쟁이 끝날 때까지 수십 년간 관여하였으니 가히 아리우스 논쟁에 대한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20대였을 때 아리우스는 이미 60대였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모든 감독에게 여기서 작성한 신조(니케아 신조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무리는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두 명의 감독(리비아의 데오나스와 세쿤더스)과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2. 아리우스 파의 반격

2년 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의 교리를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아리우스를 앞장서서 공격했던 감독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거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으나 집요하게 덤벼드는 적들에 의해 336년에 유형을 떠나게 되었다.

반대파를 제거한 아리우스 파들의 다음 단계는 니케아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인 주후 336년 아리우스가 죽었고 다음 해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죽었으므로 형세가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리우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공론화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제 드러내놓고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한 황제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틴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 유배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견해였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 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자신의 지배 영역 안에 들어온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서방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얼마 후 콘스탄틴 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 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니케아 교리를 반대한 사람이었으니 아리우스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교리가 작성되었다. 당시 감독들은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황제로부터 강요당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전에 이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세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4. 이교를 신봉한 쥴리안 황제

그런데 얼마 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키며 그들의 지도자 쥴리안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양 진영의 군대가 접전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었으므로 쥴리안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쥴리안 황제는 콘스탄틴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그는 엘류시니아인의 신비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아직까지 로마 황제가 가진 대제사장직(Pontifax-Maximus : 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사장으로서 신과 백성을 중재하는 직분이다. 예전부터 로마 황제는 태양신교의 대제사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틴과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따라 교회에 간섭하였다)을 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쥴리안은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자 그 동안 소외되었던 이교가 활성화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자기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입히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감독들이 새로운 적(쥴리안과 이교)을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5. 로마 제국의 분열과 아리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쥴리안이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안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 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 반달, 동고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 세 민족 - 헤루라이, 반달, 동고트-의 공통점은 아리우스주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카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6.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종교암흑세기를 주도한 카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회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단,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아리우스의 주장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7. 니케아 신조의 한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질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이미 성삼위일체를 공부한 성도들이라면 쉽게 그 허구성을 알 수 있으리라 믿으므로 논의를 생략하고 니케아 신조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A.D.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애매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은 쉽게 인정하나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 일이 같아서 일체라 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경 지식의 부재로 말미암아,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회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 교리로서 전해오고 있다.


8. 글을 마치며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닌, 초대교회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나온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이 진리인 것이다(미 4장 1∼절).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아는 고로(호 4장 1∼6절),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 놓았고,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혹은 성삼위일체를 부인하며,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나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고전 4장 5절)? 그가 오셔서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요 6장 45절)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씀을 깨닫게 된 우리는 성부로서, 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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