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 WATV 회원 | WATV 뉴스 | 하늘가족커뮤니티 | 인터넷방송 | 새노래나라 | 아름다운시온
생각의 틀을 깨야 구원이 보인다
 
들어가는 말
일요일은 예배 보는...
십자가를 세워야 교...
오직 아버지 하나님...
어찌 하나님이 사람...
구원의 해답은 성경...
들어가는 말
사람의 뇌는 인지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수용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피곤해하는 경향이 있다.

게으른 뇌는 불편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고정관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선뜻 받아들이는 반면 혼란을 일으킬 요소가 있는 정보들은 무시하거나 외면해버린다. 심지어 생명과 직결되어 꼭 알아야 할 정보에도 이러한 조치를 내린다. 세계적인 컨설턴트 마거릿 헤퍼넌은 이를 ‘의도적인 외면’이라 부른다.

고정관념에 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어떤 경로를 통해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생각은 계속 한 방향으로만 뿌리를 내려 다른 쪽의 가능성이나 희망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잘못된 생각일수록 뿌리가 더 깊숙이 박혀 바꾸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고정관념의 속성이다.

일요일은 예배 보는 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 일요일은 으레 기독교인들의 예배 날로 안다. 믿음이 깊은 교인이라면 휴일 아침의 달콤한 늦잠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몇 달 전, 한 목사가 주요 일간지 몇 곳에 일요일 예배가 비성경적이며 불법이라는 내용의 파격적인 광고를 게재했다. 이와 관련해 광고를 낸 목사가 소속된 곳이라고 밝힌 교단 측에서, 그 목사가 자신들의 교단과 무관한 인물이라는 보도 기사를 낸 것 외에는 별다른 반박이 없는 상태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 은퇴 목사는 칼럼을 통해, 기사를 보고도 잠잠한 한국 교회들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교인들이 신앙적 방황을 하지 않도록 일요일 예배를 지키는 것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성경적으로 답변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일요일 예배의 타당성 여부를 성경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예배일은 일곱째 날(토요일) 안식일이다(출 20장 8절, 막 16장 9절). 구약의 율법일 뿐이라는 주장이 많지만 신약시대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기록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교회 역사 또한 안식일이 사도시대까지 지켜져왔음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눅 4장 16절, 행 17장 2절, 행 18장 4절).



천주교 교리 문답집에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신 안식일이 어느 날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토요일로 기록하고 있다. ‘왜 우리는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라는 질문에는 ‘가톨릭교회가 토요일로부터 그 신성성(神聖性)을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토요일로부터 신성성이 옮겨졌다는 일요일은 가톨릭교회가 뿌리를 두고 있는 로마에서 태양신에게 제를 올리던 날이다.



원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토요일이었지만 일요일로 바뀌었고(여기에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목적이 크게 작용했다) 그 때문에 일요일 예배에 대한 정통성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성경의 한두 구절, 몇 가지 사료만 가지고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일요일 예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십자가를 세워야 교회?
몇 달 전, A시가 지역 기독교 단체와 협의해 강풍에 쓰러질 위험이 있거나 미관상 좋지 않은 교회 첨탑을 철거하는 한편 야간에 ‘빛 공해’로 지적받아 오던 십자가 조명을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끄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실행했다.

소식을 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자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위험한 철탑을 제거하고, 불야성을 이룬 십자가 불빛 때문에 수면을 방해받는 인근 주민들을 위해 십자가 조명을 끄기로 한 교회들의 처사를 칭찬했다. 더불어 이러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다.

교회의 한 관계자는 이 운동의 취지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실천해 기독교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지가 그렇다면 십자가와 관련된 기독교 본래의 정신이 궁금해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는 본디 기독교 신앙에 존재하지 않았다.

십자가를 초대교회에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물로 사용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십자가는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 인도 등지에서 오래전부터 이교의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널리 사용되어오던 형상물이었다.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으로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로마의 사형 도구였던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후 대략 4~5백년이 지나고 나서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면서 사형틀로써의 기능이 폐지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희생을 당한 곳이라 하여 희생과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럴 듯한 미화 속에 이교도들이 쓰던 신앙적 상징물은 기독교적인 의미가 지속적으로 부여되어 마침내 누구라도 ‘교회’ 하면 당장 십자가부터 떠올릴 만큼 친숙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이제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교리상 문제가 있는 곳으로 비쳐질 정도다. 확고한 신심(信心)을 갖고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며 집 안이나 자동차에 걸어두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장 4절)’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뿐?
언제 들어도 친숙하고 마음을 울리는 말, ‘어머니’. 그러나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는 절대 붙일 수 없는 단어였다. 기성 교단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만을 가르침받아온 성도들에게 ‘어머니 하나님’이란 있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지난 7월, 국내 유명 월간지에 하나님은 아버지 한 분 뿐이라는 오랜 통념을 깬 기사가 실려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기사에는 어머니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증거와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봉사 활동 및 수상 내역, 어머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성도들의 소감, 각국 언론들이 이를 앞다퉈 보도하고 있는 현황 등이 자세히 다뤄졌다.

사실 사람들의 상식에서만 낯설 뿐, 어머니 하나님은 성경의 핵심이다. 어머니 하나님에 관한 증거는 성경 첫 장에서부터 볼 수 있다.

창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남자 형상의 하나님만 존재하고 있었다. 여자 형상의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은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는데 여태 왜 못 봤지?” 하며 신기해한다. 이것이 눈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고정관념의 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머니 하나님은 계셔야 맞다. 교회에 가면 의학적으로 혈연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은 사이끼리 형제자매라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가족 사이에나 주고받는 호칭을 사용한다. 하나님과 성도들이 한 가족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뭔가 허전하다. 가족 구성원 중에 빠진 이가 있다. 바로 어머니다.

결혼을 했더라도 자식이 없는 남자는 그냥 한 여자의 남편일 뿐 평생을 가도 아버지라는 말을 못 듣는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자녀를 아버지가 낳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어머니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가 모체를 통해 생명을 얻듯 말이다.

갈 4장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어찌 하나님이 사람으로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은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못 해내실 일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면서도 딱 한 가지만큼은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를 정해둔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실 수 없다!”
이천 년 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이 땅에 아기 예수로 태어나셨다.

사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당시 유대인들은 “어찌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라 하느냐”며 예언 따라 오신 예수님을 배척했다(요 10장 30~33절). 하나님은 오직 ‘영(靈)’으로만 계셔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끝내 뛰어넘지 못한 결과는, 교회 역사에 남은 기록대로 참혹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 전철을 밟고 있는 이들이 지금도 허다하다.

사람은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으로 오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구원의 해답은 성경에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를 보면, 프랑스 귀부인이 장관에게 도둑맞고 3개월이 지나도록 찾지 못한 비밀 편지를 탐정이 하루 만에 찾아낸다. 탐정은 비밀스러워 보이는 장소만 골라 집 안을 샅샅이 뒤진 수사관들을 비웃듯 장관의 거실 편지함에서 유유히 문제의 편지를 꺼냈다. 수사관들은 중요한 편지가 남들 눈에 띄기 쉬운 편지함에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헛다리만 짚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갈 때마다 들고 다니는 성경을 단지 교훈서 정도로만 생각하고 정작 그 안에 담겨있는 구원의 비밀은 등한시한다. 지금껏 배우고 들어왔던 내용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도 거부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불편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고정관념의 성을 더욱 견고하게 쌓는다.

사 55장 7~9절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 생각만 고집해서는 절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진리의 길은 두꺼운 고정관념의 벽을 깨뜨리고 나서야 보인다. 그러자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다른 의견이나 정보들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 바울과 실라를 통해 말씀을 전해 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행 17장 10~14절).

구원은 결코 비밀스러운 곳에 있지 않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성경이 구원으로 향하는 문이다. 그 문은 당장의 편안함보다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과감히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진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만 열린다.

생명의진리 | 은혜의 설교 | 진리책자 | 특별기획 | 성경도서관 | 커뮤니티 | 잦은질문
오늘방문자 : 842 전체방문자 : 27533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