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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의 침묵은 ‘죄’
 
들어가는 말
방관도 죄다
방관의 이유
진리의 방관자가 되...
누가 선한 사마리아...
들어가는 말
잘못이나 허물로 인해 벌을 받을 만한 일을 가리켜 통상 ‘죄’라고 한다. 날마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여지없이 만나게 되는 사건사고들. 그 안에는 생사와 관련된 중죄에서부터 자잘한 경범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죄들이 난립한다. 죄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런 것도 죄가 되나’ 싶을 정도의 황당한 죄목들도 있다.

그렇다면 곤경이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경우도 죄가 될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법률로 딱히 규정되어 있지는 않아도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난 행위 또한 양심상 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설령 당장에 처벌을 적용시킬 만한 규정은 없더라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외면한 것이야말로 그 자신에게는 마음을 옥죄는 죄가 되는 것이다.

방관도 죄다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의 작가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다. 그는 수상 연설에서 “학살이 진행될 때 많은 유럽인들이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학살자의 편에 선 행위였다”라는 말로 방관의 죄를 역설한 바 있다.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나치의 죄야 더 물을 필요도 없겠으나 그러한 만행을 방관했던 주변 국가들의 행위를 죄로 단언한 그의 발언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크든 작든 누구나 한번쯤은 ‘내가 아니라도’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킨 방관자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엘리 위젤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는 누구든지 나서야 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일상의 소소한 방관은 그렇다 쳐도 인간의 귀중한 생명과 연관된 일에서만큼은 방관도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몇 해 전, 방관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중국의 한 시내버스 안에서 한 가족과 덩치 큰 안내원 사이에 차비로 인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말다툼에 승산이 없자 가족은 결국 차비를 추가로 부담했지만 부당한 처사에 억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귀 밝은 안내원은 불만을 토로하는 중학생 딸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이내 달려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소녀의 목을 졸랐다. 엄마는 비명만 지를 뿐 안내원을 당해내지 못했고 아빠는 74세의 힘없는 노인이었다. 결국 기절해서 버스 밖으로 던져지듯 밀려난 소녀는 급히 인근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이미 숨이 멎은 후였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서 더욱 경악할 만한 일은 소녀가 죽어가는 동안 버스를 가득 메웠던 승객들이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의 일에 잘 관여하지 않는다는 중국 특유의 ‘보신주의(保身主義)’를 감안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보인 그들의 침묵은 자국 내에서도 개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과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8월 일본의 한 열차 안에서 치한이 옆자리에 앉은 여성을 위협하고 폭행했지만 승객들은 보복이 두려워 뻔히 보이는 비상벨조차 누르지 않았다. 올해 11월에는 인도 동부 지역의 힌두교 사원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던 한 여성이 혼잡한 버스 안으로 끌려 들어가 폭행을 당했다. 역시 버스 안에는 50여 명의 승객이 있었으나 저지하는 이 하나 없었다. 위와 같은 사건들을 두고 현대인의 정의감 부재 등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이러한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언급되는 사회심리학적 이론이 있다. 일명 ‘방관자 효과’라 불리는 ‘제노비스 신드롬’이다.

방관의 이유
1964년 뉴욕에 사는 20대 여성인 키티 제노비스가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한 정신 이상자에게 칼부림을 당했다. 35분간이나 계속된 이 광란극을 자기 집 창가에서 지켜본 사람은 모두 38명. 누군가 수화기만 들었어도 참혹한 희생을 막을 수도 있었을 그 사건에서 어느 한 사람도 나서서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를 통해 이 끔찍한 사건과 이웃 사람들이 보인 행동이 알려지자 두 명의 심리학자가 당시 사건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행동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한다. 먼저는 대학생들을 방에 한 사람씩 들어가게 한 뒤 오디오 장치로 옆방에 있는 학생과 대화를 나누게 하고 대화 도중 학생으로 위장한 한 배우가 갑자기 발작 증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연기하게 했다. 누구라도 복도의 연구원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하면 되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자신 말고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믿은 학생들은 아무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심리학자들은 제노비스 사건에 대해, 당시 누구도 그녀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다수의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현상을 ‘제노비스 신드롬’ 이라 명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현장을 보고 있을 때에는 각각 느끼는 책임감이 분산되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는 제노비스 증후군. 과연 이 이론을 결부시켜 보았을 때, 지금까지 일련의 사건들에서 등장한 방관자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함께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경찰에 연락하거나 도와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있다가 결국 방관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관자들의 당시 심경은 어땠을까? 위의 심리학자들이 벌인 실험에서 나타난 바로는 방관한다고 해서 냉담하기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발작 실험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학생들은 옆방의 비명을 듣는 내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굳이 실험이 아니더라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단편적으로 어떤 일에서 책임을 지기 싫어 선뜻 나서지 않았을 때라던가, 당장의 불편함 때문에 자리를 피하고 난 뒤 마음이 오히려 더 거북하고 괴로웠던 느낌이 그것이다. 이는 위급하고 불의한 일을 보게 되면 외면하기보다는 나서서 조치를 취하려는 행동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기에 느껴지는 현상이다. 사실 군중 속에 있다 보면 선뜻 나서기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끝까지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그때 뛰어들 양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결국에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런저런 이유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한발 물러선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보면 때론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가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시키기도 한다. 그쯤 되면 방관이 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진리의 방관자가 되지 말라
성경에서도 죄악시 되는 방관이 있다. 죽어져 가는 영혼을 외면하는 것이다.

눅 10장 30~3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고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나름대로는 여태껏 율법에 충직했다고 자부해 왔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된 까닭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모른 척 지나쳤기 때문이다. 율법은 잘 지킨다고 하면서 죽어가는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는 분명 이율배반이다.

마 22장 35~40절 “그 중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은 천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를 마냥 두고 보실 수만은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보이시기 위해 친히 이 땅까지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설령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거룩하신 뜻 가운데 우리가 죄 사함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죄 사함의 은혜 가운데 하늘 본향을 소망할 수 있게 된 우리들이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사명 또한 하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옛적 우리들처럼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신다.

겔 3장 17~19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구원의 방법을 뻔히 알면서도 침묵으로 방관하며 영혼들을 깨우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희생의 보혈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사망 길을 걷고 있는 가련한 인생들을 속히 깨우쳐야만 할 것이다.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가
‘방관자 효과’는 진리 안에서 더 극명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수많은 파수꾼들이 있을진대 굳이 내 입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에 속한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온 세상에 속히 울려 퍼져야 할 파수꾼의 나팔 소리는 그쳐지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당장에 끊어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우리가 영혼의 근본을 깨닫고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영접하게 된 것은 바로 침묵으로 방관하지 않은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 전해 들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롬 10장 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죄인의 회개가 더욱 경건하고 의미가 더해지는 한 해의 끝자락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대를 일깨우는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녀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 힘차게 외쳐야 할 때다. 이제까지 무심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었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겠다. 분명한 소리로 나팔을 불어 잠들어 있는 영혼들을 일깨우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충직하게 지켜 행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인들로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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