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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
2021-08-25 1197

하나님은 거룩하고 신령하신 분이십니다. 영으로 계시든 육체를 입고 임하시든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에는 거룩하다는 의미의 ‘성(聖)’ 자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성령(聖靈)’이라 표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일도 신령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령한 것을 신령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을 자신이 이 땅에서 체득한 생각과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신령적 세계에 속한 일들을 신령한 안목으로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신령한 것을 육신의 시각으로 판단한 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이 땅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신령한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과 절기 규례 등 하나님의 계명을 항상 소중히 지키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인들은 신령한 세계가 그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 생활에 힘쓰는 성도들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전 2장 13~14절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육에 속한 시각으로 판단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미련하게만 보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유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으며, 회계 일을 맡을 만큼 제자들 사이에 신망을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은전 삼십 냥에 대적자들에게 판 이유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신성을 신령한 안목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생각에 메시아는 군대라도 일거에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방에 잠잠하셨고,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다른 동네로 옮겨 가시며 복음의 기별을 전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기보다는 너무도 나약한 인간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성경의 예언을 따른 행보였습니다.

사 53장 1~5절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인류의 죄를 대신해 고난을 받으시는 예언의 과정을 밟고 계셨지만 가룟 유다는 이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신데 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실까?’ ‘하나님이 저렇게 힘이 없으실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을 예언에 비추어 보기보다 육적인 생각으로 판단하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습니다.

신령한 것을 신령하게 보는 분별력을 잃자 그의 속에 성령이 아닌 사단의 영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심하던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여 대적자들에게 팔고 파국을 맞기에 이르렀습니다.

신령한 안목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

하나님께서 육체 옷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음식을 드시고 같은 생활 공간에서 같은 모습으로 생활하셔도 육신으로만 판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령한 눈으로 신령한 예언의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외형만 보았던 가룟 유다와 달리,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들은 신령한 안목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바라보았습니다.

마 16장 13~16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을 성경과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격을 조금 높여서 선지자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고 하문하실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아들’의 입장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사 9장 6절). 가룟 유다가 바라본 예수님과 베드로가 바라본 예수님 사이에는 이렇듯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 1장 1~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말씀(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말씀, 곧 하나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생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생활하시고, 마른땅에서 난 줄기처럼 사람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을 전혀 갖추지 않으셨어도 요한은 그 신성을 올바르게 알아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요 근본 하나님이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신령한 것을 신령하게 분별하는 안목을 가졌던 사도들은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으며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담대히 전했습니다(딤전 2장 4~5절, 빌 2장 5~8절, 행 4장 11~12절, 16장 24~32절). 신령한 안목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었습니다.

육적인 면모로 예수님을 판단한 유대인들

육신의 생각에 갇혀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으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시는 등,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는 능히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셔도 그들은 오로지 육신의 입장에서 판단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믿지 못했고 심지어 친속들조차 예수님을 미쳤다 생각하여 막으러 다녔습니다.

막 3장 20~21절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요 6장 41~44절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

마 13장 53~57절 “…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갈릴리 나사렛은 주로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빈천한 지역이 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배움을 문제 삼아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요 7장 14~15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학식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처럼 늘 육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한 가르침을 주셔도 “이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며 배척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교묘한 질문으로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 하셔도 이단이라 함

신령하신 하나님을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구원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거절하고 외면했던 그들은 결코 천국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분을 감추고 육체의 모습으로 오셔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데, 구원 얻을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요 10장 30~33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만약 제가 운동복 차림으로 나갔다가 아는 사람을 마주쳤는데, 제가 누구인지 얘기해도 차림새가 평소와 다르다 해서 상대방이 “어디 감히” 하며 저를 돌로 치려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야말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라는 옷으로 신령한 모습을 잠시 가리고 오셔서 “내가 곧 하나님”이라고 하시는데 저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신령하신 하나님을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니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소경이라 하시고 “소경이 소경을 가르치니 결국 둘 다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눈앞에 계신데도 알아보지 못하니 영적 소경이 아니겠습니까?

행 24장 1~5절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한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유대 사회는 여전히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까이 왔던 구원을 뿌리친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령 시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안목

오늘날 성령 시대에는 성령과 신부이신 그리스도 안상홍님과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께서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단은 2천 년 전과 똑같은 술책으로 사람들의 분별력을 흐려놓았습니다. 신령한 차원의 것을 보지 못하도록 육적인 내용만을 강조하고, 정작 하나님께서 왜 하늘에서 이 땅까지 오셨는지는 생각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 13장 13~16절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신령한 안목과 지혜를 얻어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깨닫고 시온으로 나아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혜요 축복입니다(마 16장 16~17절 참고).

우리는 참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만합니다. 세간의 훼방과 비방에 휘말려 신령한 것을 육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의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리를 끝까지 잡고, 장차 다가올 영원한 안식과 천국의 축복을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신 이유는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로 이 땅에 오셨기에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뿐입니다. 오늘날도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데는 우리의 죄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친히 육체로 임하셔서 인고의 삶을 사셨습니다. 신령한 것을 육신의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성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신령하게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들은 신령한 것을 신령하게 분별하는 영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영접하여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은혜롭게 따랐습니다. 우리 또한 신령한 눈을 활짝 열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베드로 처럼 “그리스도 안상홍님,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는 참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이 시대의 구원자이신 성령과 신부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감사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으로 따라서 구원받는 시온 자녀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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